대한민국의 대표음식 ‘김치’가 할리우드에 도장을 찍었다.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으면서 올리브와 나누는 사랑놀이라면, 김치는 세상을 지키는 수호전사로 등장했다. 비타민 덩어리인 시금치를 먹는 뽀빠이와는 노는 마당이 판이하게 달랐다. 유산균 덩어리, ‘김치워리어’의 놀이마당은 악당세균들이 득실거리는 넓은 세상이었다. 인간의 목숨을 날름거리는 사스, 말라리아, 광우병, 신종플루 등 악독한 세균들은 ‘김치워리어’의 탄생에 줄행랑을 쳤다. 세균전쟁의 승전보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유튜브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인 ‘김치워리어’를 접했다. 김치의 고향에서 ‘김치워리어’의 탄생에 큰 목소리를 내본다. 향수병에 탄생한 ‘김치워리어’ ‘김치워리어 (www.KinchWarrior.com)' 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눈에 익었다. 아니 눈에 착착 달라붙었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배추, 무, 고추, 마늘, 파, 생강, 젓갈, 고추장, 옹기 등 김치를 담는데 꼭 있어야 할 품목들이었다. 이런 재료와 양념들이 등장인물들의 얼굴, 팔, 다리, 무기로 변했다. 김치전사, 옹기로봇, 무우쌍절권, 깍두기총알, 젓갈폭탄, 고추걸, 옹기거북선은 강영만 영화감독(www.youngmankang.com , YMK FILMS LLC)의 자식들이었다. 1994년부터 머문 그의 긴 미국생활은 김치 향수병에 몸살을 앓았다. 서산 어머니의 손맛이 깃든 김치는 세상에서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서산 김치를 그리워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 선조가 남긴 고귀한 유산, 발효음식 ‘김치’가 감칠맛 깃든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되었다. 또한 세계 공항마다 검역대상으로 출몰한 신종세균들도 한몫을 했다. 질병마왕이 새롭게 등장시킨 강력한 세균들은 ‘김치워리어’의 출현에 세상 밖으로 쫓겨나니,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 힘이 용트림 쳤다.
서산촌놈 할리우드 강타 1990년대 중반 ‘KBS 한민족의 리포터, 서산촌놈 강영만 할리우드 가다’의 주인공이 일을 냈다. 할리우드를 달궜다. 집념의 결과물인 ‘김치워리어’는 시선을 집중시켰다. 할리우드는 한국의 조그만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뭔가 달라도 확연히 남달라야 했다. 따라잡기 버거운 소프트테크놀러지의 끊임없는 변화까지도 소화했다. 20세기 미래를 향한 최정상 예술 감독의 자질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노력해서 갖추었다. 한마디로 천성적인 근면성과 창의성이 몸에 배어있는 강영만은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았다. 이런 근성은 할리우드에 찌든 퇴폐적인 양상을 확 깨부쉈다. 그래서 할리우드의 지인들은 그의 프로정신을 높이 인정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면 보는 사람들이 ‘잘 그렸다,’는 감탄사에 지금의 이 자리까지 왔다. 감동하는 모습들이 좋았다. 그래서 내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시작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감동을 주고 싶었다. 감동과 논쟁, 화제 거리를 만들어서 관객들에게 던지고 싶었다. 한 작품, 한 작품을 만들면서 자식을 낳듯이 내 자신을 성장시켰다. 성장을 위한공부는 계속해야 했다.” 자만하지 않는 프로다운 그의 말은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기네스북에 오른 ‘큐피드의 실수’ 그의 학력은 그다지 특별나지 않았다. 홍대 미대를 졸업한 후, 1994년 미국의 뉴스쿨 대학원, 영화연출학으로 영화에 입문했다. TV의 CF감독을 하면서도 영화의 꿈을 접지 않았다. 배우기 위해서 영화 촬영장의 허드렛일을 자청했다. 이 대목까지는 여느 감독들이 걸어온 과정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만의 날카로운 촉각은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개인이 영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경험이 없는 나에게 기회를 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영화에 대한 욕망은 상사병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머리에 영감이 떠올랐다. 1999년 12월 31일, 미국 어디에서나 2000년의 새로운 해를 맞는 행사들이 대단했다. 이때가 일을 칠 좋은 적기였다. 다른 감독들이 만드는 절차를 따라하다가는 도저히 승부를 낼 수 없었다. 이왕 사고를 칠 바에는 정반대로 뒤집자는 각오를 했다. 기네스북을 훑었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고와 최저 예산에 필이 꽂혔다. 땡전 한 푼이라도 귀한 시절이니, 당연히 최저 독립영화에 승부를 걸었다. 이국땅에서 욕을 먹어도, 미친 짓을 해보았자 어떠하리. 그래서 뛰었다. 최저 예산은 모든 행동을 단순하게 해야 했다. 밀레니엄에 들어서는 2000년 1월 1, 2, 3일, 3일간의 연휴를 택했다. 산타모니카의 로케이션 촬영에 들어갔다. 경찰도 사람인지라 휴가로 아무런 제재 없이, 자동차, 사람들도 거리를 텅 비워주었다. 친하게 지냈던 배우 4명은 최저 출연료를 승낙했다. 배우들의 출연료 100불, 음식과 자동차 가스비 등을 합한 총예산, 980불의 영수증을 첨부한 독립영화 필름이 완성되었다. 영국 기네스 본사로 보내진 2년쯤 지난 시점에 우편함에는 기네스북 인증서가 들어있었다. 나의 첫 영화였다.” 무모? 천만에 그대로 실현하라! 이런 바탕으로 성공적인 그의 이력서는 시작되었다. 2000년에 제작된 그의 첫 데뷔작 ‘큐피드의 실수 (Cupid's Mistake)’는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미국극장에서 개봉된 ‘최저예산제작’이라는 명명이었다. 첫 데뷔작은 무모함으로 일을 해냈다. 단돈 980불로 자신의 꿈에 도전했다. 그는 일 년마다 한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다보니 이제껏 나이를 잊었다. 단지 일 년에 한두 번, 한국 방문에는 어김없이 ‘나이’를 기억하게 했다. “참 무모한 짓이었다. 작은 시작이었으나, 끝내놓으면 그게 남아있었다. 그 때부터 나의 철학으로 자리했다. 무소한 시작이 이슈거리가 되었다. 주변 분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만하지 말고, 직접 뛰어서 만들어라. 말은 없어지는데, 만들어 놓으면 남는다.”그래서 그의 향수병인 애국심의 밑바닥은 ‘김치워리어’를 탄생시켰다. 미래의 콘텐츠사업에 그는 과감한 도전장을 냈다. 막강한 기업으로 자리 잡은 미키마우스, 뽀빠이에 뒤를 이어 ‘김치워리어’도 뿌리를 내리리라.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장난감, 영화, TV 쇼, 테마파크 등 세계의 컬렉터로 우뚝 설 그의 꿈은 반드시 성공하리라. 도전을 실천하는 그의 자랑스러운 발걸음마다 대한민국을 살맛나게 한다. sungae.kim@hanmail.ne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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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17, 2010
美할리우드에 한국위상 높인 '김치워리어‘ <인터뷰>할리우드에서 한국인 감독으로 유명한 강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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